Thelma & Louise (델마와 루이스) - 세상을 향해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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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lma & Louise (델마와 루이스) 세상을 향해 쏴라 |
년도 : 1991
국가 : 미국, 프랑스 제작 : MGM 배급 : MGM 연출 :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 출연 : 수잔 서랜든 Susan Sarandon (루이스 소여 Louise Sawyer 역) 지나 데이비스 Geena Davis (델마 Thelma 역) 하비 케이텔 Harvey Keitel (할 Hal 역) 마이클 매드슨 Michael Madsen (지미 Jimmy 역) 브래드 피트 Brad Pitt (J.D. 역) 1993.12.13. 롯데월드시네마 |
영화에서, 그것도 헐리우드 영화에서 여자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가 나왔다. 예전에도 그런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
' 따위의 최루성 영화가 아닌 전격 여성 버디 무비라는 것이 이 영화 이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치고는 이례적으로 버디무비에 로드무비 형식을 띠고 있다고 선전하는 이 영화는 그 저주받은 걸작 '
Blade Runner (서기 2019 블레이드 런너)
'를 만든 리들리 스콧 감독이다.
이 둘은 주말을 이용해서 함께 여행할 계획을 세운다. 초록색 썬더버드를 타고 두명의 '여자'는 여행을 떠난다. 집안에만 억눌려 있던 델마는 새로 접하게 되는 세게에 대해 상당한 흥분을 느낀다. 마치 억누르던 남편에게 벗어난 자유를 느끼듯이.
그러나 세상 물정 모르는 델마는 길거리에서 만난 사기꾼 J.D. 에게 넘어가 갖고 있던 돈을 모두 털리게 된다. 결국 델마는 수퍼마켓 강도가 되고 검문 경찰을 협박하고 감금하고 자신들을 희롱하는 사람의 유조차를 폭파하는 등 일상에서 완전히 탈피한 모습을 보인다. 또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억누르던 남편에 맞서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여성을 불평등하게 대접하는 사회 제도나 법을 대표하는 형사의 자수 권유도 무시한다. 결국 그녀들은 광활한 그랜드 캐년에서 경찰들에게 포위되고 그녀들은 서로 손을 잡은체 그랜드 캐년의 절벽으로 차를 몰아 추락하며 영화는 끝이난다.
이 영화를 보면서 대부분의 여성 관객들은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느낌이라는 것은 아마도 통쾌함이었을 것이다. 가부장적 남성위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단조로운 결혼생활 즉, 권위주의적인 남편의 보호(굴레)속에서 벗어난 델마가 여행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과정을 해학적으로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전해 주었을 것이다.
또한 여성이나 흑인과 같은 피지배계층, 약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어지는 법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 법정 싸움이 아닌 도망자로서의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선택한 점 - 의도에서 강간을 소재로한 여타의 페미니즘 영화들과 다른점을 알 수있다.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엑스트라 흑인이 차 트렁크에 갇힌 경찰을 순순히 풀어 주지 않고 담배연기를 구멍으로 삽입하는 장면이 의아할 것까지 없는 이유 또한 영화의 의도에 부응하고자, 이미 권력자만의 소유물이 된지 오래된 법의 정의와 경찰권에 맞선, 권력자들의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의 법에 순순히 순종하는 것이 아닌, 저항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에서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부각시키려 한 것은 '여자여 자신을 찾아라.'라든가, '남성에 대항하여 일어서라.'라는 등의 남성들에게 반감만을 일으키는 과격한 여성주의가 아니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델마와 루이스의 모든 행동들은 그녀들이 남편이나 여타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앞에 말한 그런 것들이라기 보다는 이 사회에서 여성이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대접을 받기위해서 여성들은 엄청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들이라면 그렇게 되지않았을 대접을 (강간이라든가 트럭운전사의 희롱등) 받고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살인,감금,강도,차량폭파 등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러한 해소의 행동들로 인해 사회의 규약을 어기는 존재가 된다. 남자라면 받지 않았을 그러한 대접들 때문에....
델마가 '법이란 우리들에겐 쓸모없는 것이로구나'라고 한 말은 여성이라면 또는 억제받는 이들이라면 가슴에 와 닿을 만한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깨어나고자 했고 - 그 동기가 어떤 것이었고, 그들의 행적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 그 깨어남을 위해 엄청난 댓가를 치뤄야 했다. 그들을 추적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법'이었다. 텔마의 말대로 법은 그들을 보호할 수 없었다. 법은 그 목적과는 달리 언제나 강자의 편인것 같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마지막까지 내몰릴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헐리우드 영화치고는 이렇게 진지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에 대해 경탄할 만 하고, 또 그러한 주제를 비교적 잘 나타냈다는 것에 대해 이 영화는 어느 정도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영화를 한 꺼풀 더 벗기고 보면 여성의 입장을 그렇게 잘 대변한 영화라고만은 할 수 없다. 영화 곳곳에 남자 감독으로서의 한계가 들어난다.
흥행을 염두해 두고 만든 영화이니 만큼 이 영화도 페미니즘을 상품화한 맥락의 여성 소비자들을 겨냥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요염한 자태로 스포츠카에 걸터 앉은 델마와 루이스가 여행 중에 만난 변태의 거대한 차를 총으로 쏘아 불태워 버렸을 때, 그것은 게스 Guess 나 캘빈 클라인 Calvin Klein 의 사진 광고에서 보여지는 도전적인 에로티시즘을 부각시킨 여성의 이미지 - 젖가슴을 상당히 노출한 채 가죽 점퍼를 입은 여성이 오토바이에 도전적으로 앉아 있는 모습 -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이 영화가 과연 차별받는 여성이 그러한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그린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여성이 사회로부터 받는 억압이 어느정도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정말 여자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지는 않다.
일단 사건의 계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둘째로 쫓기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도록 하자. 우선 루이스의 모습을 살펴보겠다. 누구보다도 독립적으로 보이는 그녀는 쫓기게 되자마자 그녀의 '남자' 친구 지미에게 우선 전화를 한다. 계속해서 그녀는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그녀의 '남자'친구로부터 얻게 된다. 결국 여성은 남자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 억압을 탈피하여 자유로운 모습을 하는 델마의 모습은 사기꾼과 같은 모습이다. 수퍼마켓 강도라던가 카우보이 모자라던가 그녀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행동과 모습은 결국 사기꾼 '남자'인 J.D. 에게 배운 것이다. 여성은 남성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일까?
세째로 형사 할의 모습이다. 그녀들을 동정하고 자수를 권유하는 할은 여성에 반대되는 남성과 또 사회의 규범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할은 마지막까지 그녀를 보호하려고 하고 죽음을 선택한 그녀들을 안타까워하는 매우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여성을 억압한다고 보여진 그러한 남성이나 사회가 여성을 매우 생각하는 형사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매우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이는 남성이나 사회가 여성을 매우 존중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변명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습은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택한 두 여자의 모습이다. 그녀들은 'Keep going on'을 외치며 절벽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인간적인' 형사의 모습이 나온다.) 이 대사는 마치 여성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위해 계속 나아가라는 말과 같이 들린다. 그러나 이를 영화속에서 해석해 본다면 그녀들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의 도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여성이 바로 설 수 있는 방법은 도피밖에 없는 것일까?
결국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영화 곳곳에서 아직도 억압받는 여성의 진정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델마와 루이스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고 억압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여행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차별적인 사회의 모습이 많이 드러났다고 해도 이 영화를 페미니즘 화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이 여성들은 죽음이라는 엄청난 댓가를 치루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한 허무함을 드러낸다.
다시 차별에 대한 문제로 돌아와서 어떠한 때에 차별이 성립되는지 생각해 보자.
일반적인 차별을 생각해 보자. 흑인에 대한 차별.흑인은 피부가 검다. 그래서 차별을 받는다. 점점 이런 차별이 없어져서 이제는 형식적으로는 차별이 없다. 흑인이 받아 왔던 차별과 거기에서 발생한 흑인의 피해, 그리고 그 피해의 종류가 어떤것인가? 영화 'Mississippi Burning (미시시피 버닝)'을 보면 수도를 사용할때 백인과 흑인을 구별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흑인과 백인을 구별했다는 사실 자체인가, 아니면 흑인과 백인을 구별함으로써 발생하는 생활의 불편함인가?
아직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잡아야 할지를 모르겠다. 차별을 아주 상식적인 것부터 생각해 보면 아주 직감적으로 우리가 남을 우리와 같은 위치에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와 남은 다같이 다수의 사람들의 집합을 말한다. 우리와 같은 위치에서 보지 않는다면 이것은 나와 다른사람들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문제다. 그것은 '기회'이다. 민주주의 원칙의 하나인 평등의 원리를 무시하는것이 차별이다.그리고 이 평등의 원칙이 무시된다는것은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이 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더 나아가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경향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이 이기주의란 것의 성격이 상대적일수 있다는데에서 부터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발생한다. 그러면 여성의 차별이 뜻하는 바는 남성과 여성의 기회가 불공평하다는 이야기인가? 무엇을 할수 있는 기회인가와 이 기회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이야기인가가 문제가 된다. 만약 여성과 남성이 아무런 차이가 없고 다만 성의 차이만 있다면 이것은 분명 차별이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이 다른점이 있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차이를 뛰어 넘어 무었을 하려 한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하지 않는가?
남녀 평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평등을 무조건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과연 어떤 점에서 무엇이 다르고 그 다름에 따른 정당한 대접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은 무조건적인 평등의 주장은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위치에 오르려는 것과도 같다.
현실에서의 이상은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위치의 평등이다. 그리고 현실은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위치의 불평등이다. 만약 여성이 현실에서 받는 불평등이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의 이상을 위해 투쟁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남녀 평등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이 여성의 불평등이라는 전제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은 급진적인 여성 운동만을 부추길 뿐이고 진정한 남녀 평등의 길을 저해할 것이다.
이 글은 94년도인가 '여성학'수업 리포트 대필인지라.. 페미니즘 문제 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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