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 글씨 - 신이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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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신이여, 우리를 용서하소서 |
한석규의 티켓 파워가 서서히 하락하고 있을 즈음 나왔던 이 영화는 톱스타를 기용하고도 그닥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지 못한 변혁 감독의 탓인지, 아니면 한석규 탓인지 모르겠지만 흥행에 실패한다.
본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영화 자체보다는 고인이 된 이은주의 유작으로 더 많이 알려지기도 했다. (변혁 감독의 장편 2편이 모두 꽤 괜찮은 여배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사실은 우연인지?)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메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장 6절)
인간의 기원은 유혹과 그로 인한 저지른 죄, 신에 대한 배반으로 시작한다.
"모든 유혹은 재미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 항상 장난같이 시작한다. 왜 피하겠는가?"
사람이 유혹에 걸려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기는 힘들다. 또 이로 인하여 죄를 짓거나 또는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본성이다. 인간은 태초부터 그러한 존재였고, 계속해서 그렇게 존재해 왔다.
"Pace, Pace. 신이여 평화를 주소서" (Verdi, 'La Forza del Destino')
애초에 신을 배신한 것은 인간. 유혹에 빠져 신을 배신한 인간이지만,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얻는 고통을 외면하고자 인간은 자신이 배신했던 존재인 신에게 바란다. 비록 죽음일지라도, 나에게 평화를 주소서.
'주홍글씨'는 인간의 유혹과 배신에 대한 영화이다.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스릴러가 아니다.
영화는 형사 기훈이 (한석규)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름다운 아내 수현과 (엄지원) 내연녀 가희 (이은주), 그리고 살인 사건에 연루된 미모의 미망인 경희까지 (성현아). 이정도라면 형사와 주변 3명의 여성들간의 치정까지 엮인 에로틱 스릴러의 겉모습을 갖추기에 충분하다.
정작 영화는 살인 사건의 해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사건은 해결되고(?) 진범까지 밝혀지긴 했지만, 이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그 살인 사건이 아닌 기훈과 가희의 치정 관계이고, 결국 스릴러로서 극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 사건(?)은 살인 사건의 해결이 아니라 치정에 얽힌 사람들의 관계가 밝혀지는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꽤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미망인 경희가 나머지 세명의 관계에 그다지 깊이 파고 들어가지 못한 것은 실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했으면 괜찮은거 아냐?
"사랑했으면 괜찮은건가요?"
재즈바에서 보컬을 하고 있는 가희의 호화로운 집이라든지, 꽤나 세련되게 정장인 기훈의 차림새라든지, 비현실적인 초반의 설정은 영화 말미의 기훈과 가희가 받게되는 '심판(?)의 공간'과 대비를 이루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겠다. 밝고, 우아하고, 화사한 주인공들의 일상 삶의 공간에서 유리되어 좁고 컴컴한 그 공간에서 벌어진 기훈과 가희의 대화는 우리가 생각했던 유혹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뒤집는다.
유혹하는 여자와, 그 유혹에 넘어가 아내를 배신한 남자. 그리고 그 둘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고 생각했던 둘의 시간은 사실 유혹하는 여자와 유혹에 넘어간 여자. 그리고 그 여자에게 이용당하는 남자에게 고해하는 회개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서로를 배신하고, 또 서로에게 평안을 얻고자 하는 관계... 그 종말은 역시 끔찍한 파멸...
Post Script
변혁 감독과 한석규가 가장 공들여서 촬영한 장면이라고 하는 신은 무려 33번이나 재촬영해서 간신히 얻어낸 이 장면이라고 한다.
수현아, 자니?
수현의 연주회가 끝난 후, 가희의 빌라를 찾아가 섹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는 기훈. 카메라가 돌면 침대의 다른 한편에는 수현이 잠들어 있다. 이 장면에 대해서 변혁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보통 불륜을 저지르면, 다시 옷 입고,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피곤해'라고 말하고, 다시 잠드는 단절이 있다. 이 30분간의 단절과 그로 인한 망각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짓인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는 불륜과 집에서 잠드는 것을 하나의 공간에서 연결하여 보여줌으로써, 30분의 단절로 인한 망각을 제거하였을 때의 상황을 보여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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